사랑 하는 너는 / 이병주


          사랑 하는 너는
          아침에 여명을 걷으면서
          뒤척이다 흘린 눈물 씻어주는
          태양 이 되고

          낮이면 나무에
          매달려 발버둥치는 낙엽보다는
          발길에 살포시 뒹굴다가
          바스락 소리 내며
          나의 혼을 깨우쳐 주는
          낙엽 이였으면 좋겠구나.

          밤이 되면
          귓전에서 울어대는 귀뚜라미보다는
          창가에 살며시 얼굴 내밀어
          내 마음 보듬어 주는
          달님 이였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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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늘푸른 다락방/봄 2010. 4. 28. 21:28
민들레

글/이병주

살아온 날들이 그리 힘이 들었는지
돌담 밑에 웅크린 민들레는
봄비 내리는데 오늘도 찌들어 있다.
겨우내 모진 찬바람 그리 이겨냈어도
소슬바람이 힘겨운 듯 여윈 이파리는 파르르 떨고서

봄이 오고 새가 울어도
기약 없는 벌 나비만 기다리는지
노란 꽃 무덤 안고 찌들어진 채
나그네 바짓자락 부어 잡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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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으세요.”

60대 후반의 어르신께서 흔들리는 전철 손잡이를 잡은 채 나에게 자리를 권하기에

난 너무 놀래 우선 급 한대로

“아닙니다. 난 바로 내릴 것입니다. 어르신 앉으세요.”

그러자 그 어르신은 마지못한 것처럼 자리에 앉으신다.

금방 옆자리에서 젊은이가 빈자리에 앉자마자 눈 딱 감아버린 모습하고는 아주

딴 상황이었다.

어르신은 내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염색을 하지 않고 다니니까 내가 나이가 많이 들어 보이는지……. 우리들이 어릴 때 배운 것처럼 남에게 양보하는 마음에 난 새삼 흐뭇한 기분이 들어

역시 우리들이라도 지켜야 하는 예절을 새삼 느끼게 해주신 어르신에게 무언의 감사 드린다.

30대부터 새치로 시작된 머리가 세월만큼이나 희어져 이제는 백발이 다되어 있지만

여러 가지 부작용 때문에 염색을 못하고 그냥 다니다가 오늘 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어르신에게 자리를 양보 받는 지경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한 정거장 지나니까 옆자리도 일어나니 어르신은 얼른 나에게 앉으라고 하시면서 손으로까지

나에게 권하고 계신 것 아닌가

“감사합니다. 어르신 어디까지 가십니까.”

“예 종점까지 갑니다. 그런데 어디까지…….”

“난 길음까지 갑니다.”

라고 대답을 드리니 그제야 어르신은 이상한지 나의 얼굴 과 머리를 번갈아 보시고 계신 것 아닌가

[난 사실 아직 젊어요.]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주위 여건상 말씀을 못 드리고

그럭저럭 길음 역에서 내리려고 일어서면서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난 여기서 내립니다.”

“예…….”

대답이 흐려지면서 또 한번 나의 얼굴 하얀 머리를 번갈아 보시고 계시는 것이다.

난 아무 말도 못 드리고 속으로만

[나 이제 5학년 4반 이여요] 하면서 성큼성큼 내린 후 떠나가는

전철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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